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2·12 군사반란 직후 김영삼·김대중 육성 인터뷰 최초 공개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2·12 군사반란 직후 김영삼·김대중 육성 인터뷰 최초 공개

입력 2025.12.11 10:43

- 언론통제·비상계엄 속 민주화 지도자 2인의 정세 인식 담긴 8분 13초의 기록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인 12월 13일, 미국 뉴욕의 자유신문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과 진행한 전화 인터뷰 음성 자료를 공개했다. 
해당 인터뷰는 총 8분 13초 분량으로, 당시 국내 언론이 통제되고 비상계엄이 발령된 상황에서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군사반란 직후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소식이 외신을 통해 미국에 알려지자, 재미교포들이 운영하던 자유신문은 국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김영삼·김대중 두 인물과 긴급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로 야당의 민주 세력을 대표했으며,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으로 재야 민주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두 인물은 1979년 당시 한국 민주화 세력 전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해외 언론은 이들의 판단을 통해 한국 정세를 파악하고자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인터뷰는 12·12 군사반란 직후 국내 정세와, 10·26 사태 이후 개헌 및 민주화 과정에 대한 두 인물의 인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자료는 다음의 4가지 측면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1) 12.12군사반란 직후 민주화 세력들이 민주화 이행에 대해 불안한 징후를 감지하고 있었다는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큰 자료
기자는 외신 보도에 근거하여 “정승화 장군이 죽었다고 하고, 일선에는 최규하 대통령이나 또는 신현확 총리가 체포돼 있다는 설도 있어서 말입니다.”라고 질문하고 있다. 물론 이 내용은 사실과는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질문의 의도다. 기자는 외신의 보도를 보고 12.12 사태가 한국의 민주화 이행을 어렵게 할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김영삼-김대중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영삼은 10.26 이후의 불안한 과도기 상황이 조속히 종식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그래갖고 뭐, 빨리 추진해서 우리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저, 당분간요, 여기 사정이 인터뷰하기가 좀 어렵게 돼 있어서요.”라고 답하고 있는데 이는 12.12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김대중이 도청이 이뤄지고 있는 전화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대중이 당시 상황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그 이후의 행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2) 김영삼-김대중 두 인물의 협력과 연대의 역사를 확인시켜주는 자료
이 사료는 한국 민주화 세력의 양대 지도자이자 양김으로 불리운 김영삼-김대중 두 인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영삼은 김대중과의 갈등설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누가 그 마음대로 하는 말 아니오? 그건 사실과 전혀 상관 없어요.”라고 일축하면서 “우리가 뭐, 이전에도 다시 재확인하고 그랬어요.”라고 답을 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을 보면 두 사람은 경쟁과 협력을 반복했지만 실제 협력의 역사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서의 단일화 실패만을 강조해서 대립과 경쟁의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음성자료에서 보듯이 두 인물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민주화 과정에서 공동 대응을 한 경우가 더 많았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김영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김대중이 김영삼을 지지했기 때문이며 김영삼의 당선이 유신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영삼-김대중의 연대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이 자료는 이와 같은 두 인물의 역사적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3) 언론통제와 감시가 심했던 군사독재 정권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
이 인터뷰를 보면 통제를 받고 있던 국내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국내 언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 있던 해외 언론조차도 서울 중심지에서 발생한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만큼 당시 한국 사회가 군사독재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김대중은 도청을 우려하여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당시 군사독재 정권의 강력한 언론통제 및 감시와 탄압의 실체를 알 수 있다.

4) 희귀자료로서 역사문화콘텐츠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자료
1979년 10·26부터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이자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두 인물의 현존 육성 자료는 드물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가치는 크다. 

박명림 김대중도서관장은 “이 인터뷰는 12·12 직후 국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며 “언론 통제와 비상계엄 아래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시기, 민주화 세력의 대표들이 어떤 판단과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자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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