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21 사업의 지나온 20년, 다가올 20년

BK21 사업의 지나온 20년, 다가올 20년

입력 2020.03.27 14:28 | 수정 2020.03.27 14:34

연세대학교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강호정 교수

지난 주말 방 정리를 하다가 빛바랜 칼라 사진 하나를 찾았다. 무려 지난 세기에 찍은 사진으로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하던 시절 미국의 한 학회에서 한국 젊은 연구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멋진 산을 배경으로 호텔 방에서 찍은 사진에는 5명의 젊은이들이 웃고 있었다. 사실 내 호텔방에 빈 침대가 하나 있어서, 한국 학생 한 명을 초청했는데 여비가 부족한 한국 대학원생들이 한둘 들러붙더니 결국 5명이 한방에서 자게 된 것이다. 
요즘 국제 학술 대회에 참석하는 한국 대학원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오히려 기초과학의 연구비가 부족하고, 특히 환경과 생태 관련 연구비를 대폭 삭감한 트럼프 정부 하에서 미국의 대학원생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학회 참석을 해야 하는데, 비행기 값을 아끼려고 20시간도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 와서는 호텔비용을 아끼려고 한방에서 너댓 명이 찡겨서 자는 모습 말이다.
한국의 대학원생들이 이렇게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해진 것은 BK21이라는 지원 사업 덕분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되어 3번에 걸친 지원 단계를 거쳐서 이제 BK21 Four라는 이름의 4단계 사업에 돌입하려는 시점이다. 매년 2천억 이상의 자금을 20년도 넘게, 그것도 철학이 다른 다섯 개 정권에 걸쳐서 대학원 연구에 지원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 것이다. 이 기간에 수혜를 받은 인원은 40만 명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정부 주도의 대학원 교육 지원 사업이 적절하고 효율적이냐는 질문에 어느 누구도 100% 확신에 차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저렇게 했었어야 하는데’라는 말은 하지 않은 만 못하다.
BK21 사업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의 논거는 이러하다. 국제학술지 발표 논문수의 세계 순위가 사업 시작 전 18위에서 12위로 증가하였고, 논문의 영향력을 표현하는 소위 ‘Impact Factor’라는 것도 거의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또 QS 세계 대학평가에서 100위권에 들어간 한국의 대학이 1999년에는 단 하나도 없었지만, 이제는 5개에 이르는 양적 성장을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림자도 있다. 논문 숫자는 많지만 아무도 인용하지 않는 가치 없는 논문을 양산한 것도 사실이다. 발표된 논문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표시하는 피인용 횟수는 아직도 세계 30위권 밖이다. 정부에서 일률적으로 줄을 세워서 등수를 매기고 점수에 따라 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진정한 경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인 평가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자율성이 강조되는 대학에서 말이다.
어제 다른 대학의 교수 몇 명과 모여서 공동연구를 위한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를 하다가 알게 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나쁜 소식은 모인 사람 중에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는 사실이고, 좋은 소식은 나머지 교수들 모두가 BK21의 지원을 받아서 국내 대학에서 배출된 박사들이고, 전원 모교가 아닌 타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점, 즉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세계 몇 위’하는 등수보다도 이 체험 하나를 통해서, BK21 사업이 돈 낭비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경험이 일천한 대학원생이었을 때 국제 학회에 참여하고 외국 연구소를 방문해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고, 지도교수의 경제적 지원에 목매지 않고 하고 싶은 연구를 실컷 했던 덕에 지금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30-40대 교수들은 Nature지를 포함한 세계적 학술지에 독자적으로 논문을 게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니, 1999년에 계획한 그림의 적어도 일부는 완성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다. BK21 Four에서는 연 4천억 원의 예산을 사용해서 매년 2만 명에 가까운 대학원생과 젊은 연구자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부가 주도하고 관여하는 일의 가장 큰 맹점은 ‘무임승차자’가 있다는 점과, 시장과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점이다. 소위 명문대학이라는 곳에 우수한 교수와 학생이 모여 있을 확률이 높긴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명문 대학의 ‘비명문’ 교수와 학생들에게 낭비될 자원을, 비명문 대학의 ‘명문’ 교수와 학생들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또 정부 지원에 목을 매지 않고, 사립대학들이 스스로 돈을 벌어서 연구력을 향상 시킬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서 혁명적인 개혁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BK21 Four의 성공적인 출발과 더불어 이 사업이 완료된 후 그 다음 20년의 수순을 내다볼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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